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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13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여행 - 두브로브니크의 필레 게이트와 플라차 대로 그리고.. / 201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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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 도착했다. 두브로브니크라는 이름이 왠지 좀 낯설었는데, 원래 이곳은 '라구사(Lagusa)'라고 불리던 곳었다고 한다. 그 순간, 어릴 때 밤새면서 했던 '대항해시대2'라는 게임의 지도가 머리 속에 펼쳐지며, '라구사'라는 항구가 기억이 났다. '아, 게임 속의 그 곳이 이 곳이었구나.'


몇 시간 전만해도 사라예보(Sarajevo)에 있었다. 두브로브니크에 온 지금은 솔직히 말하면 너무 생경해서 벙져 있었다. 나라가 바뀐 것 따위는 상관없었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달랐다. 잿빛 하늘에서 비를 흩뿌리던 칙칙했던 사라예보의 날씨와는 달리, 이 곳은 아드리아 해가 푸르게 보였고, 파랗게 맑은 하늘에서 눈부신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관광객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보이던 사라예보였지만, 이 곳은 모두가 관광객이었고, 그 수도 어마어마했다. 되려 현지인 찾기가 어려웠다.


사라예보가 조금 칙칙했다면, 이 곳은 너무나 푸르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사라예보가 축 늘어져 있다면, 두브로브니크는 활기찼다. 사라예보가 패션에는 무관심하고 무뚝뚝하기만한 남자 같다면, 두브로브니크는 세련되고 우아하며 어여쁜 여자 같았다.


사라예보가 두브로브니크보다 못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는 사라예보를 너무나도 좋아하며, 그저 두 도시가 다르다는 것을 이미지화 하여 기록하려 했을 뿐이다.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원래 예약된 방의 청소가 안되어서 다른 방을 받았다

2층 침대가 있는 2인실을 나 혼자 사용했다

사진은 '네움(Neum)'에서 사온 과자인데, 맛은 그럭저럭



숙소가 필레 게이트에서 매우 가까워 몇 걸음 걸으니 '필레 게이트(Pile Gate)'에 이르렀다

게이트 바깥에서 바라본 아드리아 해와 두브로브니크 성벽

한 눈에 봐도 성벽이 매우 단단해보였다



두브로브니크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했던 '로브리예나츠 요새(Fort Lovrijenac)'

또는 '로렌스 요새(Lawrence Fortress)'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3개월만에 뚝딱뚝딱 지은 것에 비해서는 그 위용이 상당했다




필레 게이트(Pile Gate) 앞 광장의 모습

'여행자 센터(Tourist Information Centre)'이 있었고, 많은 버스가 지나갔고

사람이 바글대다 못해 드글드글 댔던 곳



그리고 '필레 게이트(Pile Gate)'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 많은 거 별로 안좋아하는데, 사람이 정말 많았다

날씨도 좋고, 도시도 예쁘고 해서 문으로 들어갈 때 설레더라는



필레 게이트 상단에는 '성 블라이세(St. Blaise)'가 조각되어 있었다

이 분은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인데, 잘 보면 왼손에 두브로브니크(도시)를 들고 있다

베네치아의 침략을 사전에 눈치채고 사람들에게 대비를 시켰기에, 성인으로 추앙 받는다



1438년에 만들어진 '큰 오노프리오스 샘(Big Onofrio's Fountain)'

필레 게이트를 지나 성의 내벽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여기가 거의 메인 광장(?)이더라



사람 많은 거 싫어하는데, 사람이 정말 많았다

보기만해도 한숨이 나오더라는

배경으로 있는 밋밋한 건물은 프란시스 수도원이다



오노프리오스 샘 앞에는 하트모양의 기념품을 파는 키 큰 아저씨와

각종 투어 신청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앵무새와 드레스 코드도 맞춘, 이 여자가 가장 독특했다

그러나, 여기는 관광지! 앵무새와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야 했다



다른 각도에서 본 큰 오노프로오스 샘과 '성 사비오르 교회(St. Saviour Church / Crkva sv. Spasa)'

성 사비오르 교회는 1520년의 대지진의 생존자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지은 교회이다

신기한 건, 1667년 대지진이 한 번 더 왔는데 저 교회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것



교회의 이력을 알고는 신기해서 들어가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출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복원된 건물과는 달리, 한 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인다



성 프란시스 수도원과 성 사비오르 교회 사이의 조그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1317년부터 운영된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약국이 나온다

'LJEKARNA', '약국'이라는 뜻이고, '예카르나' 라고 읽는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아쉽게도 바깥에서 담았다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플라차 대로(Placa ul.)'

그런데 현지인들은 '스트라둔(Stradun)' 이라 부른다고 한다

1667년 대지진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플라차 대로 변에 있던 생각보다는 수수한 건물들

원래는 건물들이 아케이드가 있을 정도로 굉장히 화려했으나

1667년 대지진 이후로 건물을 간소하게 짓는 걸 법으로 제정한 결과라고 한다



사진을 찍으며 고달팠던 것은 햇빛은 너무 강하고

그늘진 곳은 너무 어두워서 프레임 안의 노출 차이가 극과 극이었다는 것



두브로브니크의 북쪽은 위 사진처럼 좁은 골목과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바글바글 대던 곳에서 사람이 없던 순간을 발견해

빛의 속도로 재빨리 한 컷 담았다



종탑(Bell Tower)은 스플리트에서 더 웅장하고 멋진 녀석을 보고 왔기에

솔직히 말하면,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플라차 대로의 끝에는 '루자광장(Luza Square)'이라는 작은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행사 때 국기계양대로 사용되는 기둥이 있다

'롤랑의 기둥(Roland Column)'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기둥의 한 편에는 중세 최고의 기사인 롤랑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밀라노 출신 예술가 보니노의 15세기 작품이라 한다



저 기둥을 보고, '여기는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인데, 왜 이 곳에 중세 프랑크 왕국의 기사인 롤랑이 조각되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답을 찾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알아봤는데,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중세에 '롤랑의 노래(The Song of Roland)'이라는 프랑스의 서사시가 있었는데 작자는 미상이고, 여러 사람들에 의해 각색된 채 전해지다가 11세기 이후로 이 작품이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이교도와 싸우면서 자신의 왕을 배려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영웅의 모습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이곳 두브로브니크에도 롤랑의 노래가 전해졌고, 이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루자 광장 한복판에 있는 국기 계양대에 롤랑의 조각을 새긴 것. 아마 우리들도 롤랑처럼 목숨을 바쳐 라구사(Lagusa : 두브로브니크의 옛이름)을 지키자, 라는 마음으로 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롤랑은 8세기 경에 실존했던 중세 기사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시로 만들어져 '롤랑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역사에 근거하지만 세부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여튼,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 롤랑의 노래(The Sonf of Roland) 내용 요약 ]


중세 프랑크 왕국에는 '롤랑'이라는 훌륭한 기사가 있었다. 당시 그의 조국은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스페인, 포르투갈)을 지배하고 있던 '사라센(Saracen : 북아프리카 모로코 등의 지역 내 이슬람 교도를 서유럽인들이 지칭하는 말)'이라 불리우는 이슬람 세력과 전쟁 중이던 상태였다. 그리고 7년 간의 전투에서 승리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사라센들을 거의 다 몰아낸 상태였다.


그런데 사라센들이 계략을 꾸며, 거짓항복을 위한 협정을 제의해 오게 된다. 이를 간파한 롤랑은 자신의 양아버지인 '가늘롱'을 샤를마뉴 대제에게 추천하고, 결국 가늘롱은 평화협상을 위한 외교관(사자)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전쟁 중인 상대편에 외교관으로 가는 것은 위험한 일. 그래서 가늘롱은 롤랑이 자신을 추천한 것을,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이라고 생각해, 평화협상을 하고 오는 대신에 사라센들과 결탁해 롤랑을 죽일 계략을 세워 온다.


롤랑은 이 항복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간언하나, 샤를마뉴 대제는 이를 듣지 않고, 군대를 프랑크 왕국으로 되돌리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가늘롱의 추천에 따라 후미를 롤랑에게 맡긴다. 그러면서 롤랑에게 뿔피리를 건네면서 위험에 처하거든 이걸 불어 구원신호를 보내라, 라고 이야기한다.


사를마뉴 대제의 본대가 철수하자마자, 가늘롱은 사라센 군대와 내통하여 약 50만명의 대군으로 롤랑의 군대를 공격하는데, 이 때 롤랑의 군대는 약 2만 명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롤랑이 있던 곳은 롱스발 계곡이라는, 포위되기 쉬운 곳이었다. 롤랑은 사를마뉴 대제가 군대를 되돌리지 않게 하려고, 뿔피리를 불으라는 기사들의 간언에도 뿔피리를 불지 않고 싸우다가 2만 명의 군대가 거의 전멸한 순간에서야 세 번의 뿔피리를 분다. 상처입은 롤랑은 자신의 명검인 듀랜달(또는 뒤랑달)이 사라센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부러뜨리려 하나 여의치 않자, 최후의 순간까지 칼을 휘두르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사를마뉴 대제가 뿔피리 소리를 듣고 군대를 되돌려 도착했을 때는 2만 명의 군대와 롤랑이 모두 전사한 상태였으며, 이에 분개한 사를마뉴 대제는 사라센들을 공격해 전멸시켜 버리고, 진상을 조사해 '가늘롱'을 사형시킨다.



전혀 궁전같지 않은 궁전인 '스폰자 궁전(Palača Sponza)'

옛날에는 세관사무소, 은행, 행정기관, 공문저장소, 무기저장고가 함께 있었다는데

지금은 역사 자료를 보관하는 곳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분은 너무 예쁘셔서 한 컷 담았다

사진으로 다시봐도 설렐 정도로 너무 예쁘다



플라차 대로 끄트머리에서 맞은편 필레 게이트 쪽으로 바라본 모습

여행을 계획할 때는 거리가 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너무 짧아서 예정보다 급속도로 짧아지는 여행에 좀 당황스러웠다



스폰자 궁전 앞에서 기념품을 파는 분의 모습

신기한 게 일상에서도 흔히 보는 풍경인데

여행을 오니, 같은 풍경이라도 뭔가 특별해지더라 



'성모마리아 승천 대성당(Katedrala Marijina Uznesenja)'을 배경으로

지도 또는 책자를 확인하던 여행객들

외국인들은 왠지 여행객들도 패셔너블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청바지에 운동화와 면티셔츠였는데



성벽을 돌아 내항/구항구으로 왔더니, 배 위에서 피로연이 한창이었다

신랑은 머리가 좀 벗겨졌는데도 선글라스와 수트빨이 있더라

그리고 식당에서 천편일률적으로 하는 우리네 결혼문화랑 다른 모습이 부러웠다



나도 예식장에서 형식적으로 하는 거 말고 저렇게 배 위에서 결혼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비싸겠지, 비쌀거야, 비쌀거 같아

두 분, 행복하게 사세요



현재의 내항/구항구는 거의 관광객 위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왼쪽의 레스토랑을 제외하면, 그늘진 곳과 저 앞쪽이 모두

투어상품을 설명하고 판매하는 부스였기 때문이다



루자 광장의 국기 게양대 앞에는 아래와 같이 금이 그어져 있다

이 길이는 51.2cm 인데, 롤랑의 오른손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와 같으며

옛날의 두브로브니크에서는 측량의 단위로 사용되었다

이 금이 있는 이유는 단위를 모두에게 공개해, 속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직 못 돌아본 부분이 더 많았지만, 해가 질 때 쯤에 성벽투어를 하고자

다시 루자 광장으로 돌아와 성 블레이세/블라시우스 교회(St. Blasise/Blasius Chruch) 계단에 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여자/여자와 남자/남자가 따로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뭔가 느낌을 살리고자 했는데, 뭔가 좀 모자른 것 같기도 하고



'성 블레이세/블라시우스 교회(St. Blasise/Blasius Chruch)'의 내부

생각보다는 작았고, 생각보다는 중앙만 화려했다

실제로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한 컷만 찍고 조용히 나왔다



루자 광장(과 성 블레이세/블라시우스 교회의 전경

교회 꼭대기에 있는 성 블레이세 주교의 동상은 신기하게도

그 어떤 지진이나 화재, 심지어는 폭격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오후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HJ, JH, HG 세 친구들. 플리트비체에서 만나서 저녁을 먹고서는 나는 자다르(Zadar)로 그리고 그들은 스플리트(Split)로 가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두브로브니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들과 만 하루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는 모스타르를 포기했다.


낮에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한 나는 시내를 조금 구경한 다음, 성벽투어를 하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도착했을 때, 이 친구들은 로크룸 섬에 가있었기 때문. 두브로브니크 구시가가 워낙 작은 데다가, 나는 이 곳에 3일이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다 둘러보지 않은 채로 성벽투어를 하기 위해 '큰 오노프리오스 샘(Big Onofrio's Fountain)'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