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신경숙 -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반응형

언젠가 친구에게 나에 대해 물어본 기억이 있다, 이를 테면 성격이라든가, 외모 같은 것들을. 토막난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 당시에는, 말하기를 주저하던 친구와 그와는 반대로 대답을 재촉하던 내가 있었다. 혹시라도 '나 자신이 모르는 내가 있는지' 친구의 대답을 귀 기울여 들었던 나.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 같은데도 왠지 모를 힘에 이끌려 친구를 닥달했었던 것 같다.


그 때, 무슨 대답을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당시의 난, 남이 보는 나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조금 씁쓸해지는 순간이었지만, 그로 인해 조금 성숙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내내, '내 안에 잃어버린 기억이 존재한다면,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남자친구의 프로포즈를 거절하는 하진. 잃어버린 기억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희미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반려자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망칠 수 있는 위험한 일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위해, 또한 자신을 위해, 희미한 정체성의 원인인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일상을 잠시 떠난다. 타인만이 알고 있는 잃어버린 기억. 나 자신이 모르는 내가 있고, 그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 나의 정체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관계의 정체성을 위하여.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하면, 타인과의 관계도 애매모호해진다. 관계는 두 개의 실체가 상호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희미해져버리면, 내가 상대에게 건네는 마음까지도 희미해져 버린다. 그래서 희미한 내 마음을 받아든 상대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이다. 한편, 희미한 나를 보며 상대는 자신의 마음을 건넬 확신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난 그런 의도가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 상대는 나에게서 결락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정체성이 희미한 이유는 각자 다를 것이다. 하진은 관계의 단절로 인한 슬픈 기억이 그 원인이었지만, 정작 내 정체성이 흐린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난 일을 되돌아 봐도 잘 모르겠다. 단지, 하진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왜 사람의 눈을 보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 하는지. 왜 사람을 자꾸만 피하려 하는지. 이 매듭을 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득하다. 그저, 현재를 수긍해야 새로운 관계 또는 정상적인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하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다시 자각한 것이 전부이다.


사람을 무서워하여 관계가 비정상적인 내가, 이 소설로 말미암아 내 정체성을 확립시키고, 관계를 확장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작가가 믿고 싶다던 글의 힘. 즉, 소설의 효용가치일까? 솔직히, 내 스스로 그것이 가능할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정체성'과 그것에 바탕을 두고 확장해 나가는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저자
신경숙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1999-02-1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작가 신경숙(36)이 세번째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가격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