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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13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여행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스플리트(Split) 1부 / 201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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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찍 일어나 씻고 짐을 챙겼다.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난 셈이었는데, 샤워를 하고 나오니 다른 방에서 여자 두 명이 일어나 짐을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호스텔에서 내가 유일한 동양인인 줄 알았는데, 어제 못봤던 중국이나 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아직 자는 친구들을 깨울까봐 짐을 하나씩 들고 밖으로 나와 정리를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진을 한 장 담았다.



자다르 호스텔 'The Drunken Monkey Hostel'

왼쪽의 열린 창문은 좁은 주방이 있는 곳이고

저 아래 정면은 데스크, 오른쪽은 바(Bar), 왼쪽은 숙소이다



짐을 한참 챙기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길래 보니, 남자들 몇 명이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여기에 숙박하는 사람이면 비밀번호를 알텐데, 모르는 게 좀 이상해서 물어보니, 잠 잘 방을 구한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스텝이 아니라고 하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짐을 다 챙기고 걸어나왔다. 어제는 골목길로 꼬불꼬불 갔었는데, 하루 머무는 동안에 익숙해져 더 쉬운 길로 걸었다. 어제 호스텔로 걸어올 때는 좀 멀게 느껴졌었으나 이상하게 짧게 느껴졌다. 회색의 건조한 터미널을 한 바퀴 돌으니, 빵집이 있었다. 마침 자그레브(Zagrab)의 빵집이 생각나 들어가서 빵을 두 개 샀다. 하지만 자다르 버스터미널에 있는 빵집의 아줌마는 매우 불친절 했고, 빵은 퍽퍽해서 별로 맛이 없었다.


터미널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왠 강아지 한 마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쫒아다니면서 구걸을 하더라. 먹을 걸 들고 있는 사람들 보면 그 앞으로 가서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피우다가 그 사람의 반응이 냉담하면 이내 다른 사람에게 가서 다시 꼬리를 흔드는 행동의 반복. 불쌍하기도 하고, 영악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터미널에는 한국인 중년부부와 한국인 여자아이 두 명이 있었다. 나는 영어 이외의 말은 하지 않으면서 한국인인 것을 티를 내지 않았다. 여자아이들은 잘 모르겠는데, 한국인 중년부부는 스플리트에서 나와 함께 내렸다. 그리고는 가만 보니, 현지에서 숙소를 잡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이채로웠다.


여튼,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탔고, 몇 시간을 이동해서 스플리트(Split)에 도착했다.



스플리트(Split)의 숙소(호스텔), Split Guest House의 모습

어딜봐도 간판이 없어서 헷갈려서 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아닌 것 같지만 여기가 맞고, 오른쪽에 있는 갈색 문이 입구



숙소에 들어가니 어떤 여자분이 있었다. 스텝인 줄 알았는데, 옆집에 사는 이웃이라고 한다. 지금 요스코(Josko/호스텔 주인)이 밖에 있어서 자기가 대신있다고 했다. 내게 지도를 주면서 간단한 설명을 해줬다. 체크인과 숙박비 지급은 이따 오후에 하기로 하고, 밖으로 나섰다.


이 호스텔은 호스텔월드(Hostel World)에서 평이 매우 좋다. 버스 터미널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었으며, 실제로 들어가보면 호스텔이라기 보다는 가정집이었다. 넓은 가정집에 침대를 들여다 놓은 것. 스텝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젊은 여자를 따라 거실에 들어가보니, 깜짝 놀랄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는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이 남긴 엄청난 양의 메시지/편지가 붙어 있었다. '하나같이 '잘 지내다 간다', '최고의 호스텔이었다', '고맙다' 등등의 칭찬 일색이었는데, 우리나라 여행자들의 메시지도 몇 장 있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대부분 젊거나 어린 여자 여행자들이 작성한 것 같았다.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주인인 요스코는 호스텔에 함께 살지 않고 별도의 집이 있다. 저녁에 내 체크인을 위해서 숙소로 다시 온 그는 상당히 큰 체구의 젊은 남자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굉장히 호탕한 성격을 가진 쿨가이였다. 젊은 여자들의 호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호방한 스타일이었다. 얼굴도 잘 생긴 편이었고.


처음에 봤을 때는 허세 가득한 양아치 쪽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바닷가에 와서 저 건너에 있는 선착장을 담았다

나는 가지 않지만, 저 배들 중에 흐바르'(Hvar)'로 가는 배가 있겠지

Blue Line 이라고 써진 큰 배를 타보고 싶었다



숙소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니, '프라뇨 투지만 광장(Trg. Franje Tuđmana)'에 이르렀다

참고로, '프라뇨 투지만(Franje Tuđmana)'은 크로아티아의 1대 대통령이다

크로아티아를 독립시킨 업적과 독재자의 비판으로 갈린다는 인물



야자수가 심어진 해안가를 둘러보고 길을 걸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보기 전에 먼저 이 거리부터 걷기로 했다

'Obala Hrvatskog Narodnog Preporoda' 라는 이름의 길인데

'복원된 국립 크로아티아 해안길' 이라는 제법 딱딱한 의미이다



대리석과 야자수가 시원하게 깔린 스플리트 해안길, 'Obala Hrvatskog Narodnog Preporoda'

원래 이곳은 바다였으나, 언제부턴가 메워져 사람들이 걷는 인도가 되었다

사진의 왼편은 레스토랑의 노천 좌석이, 오른쪽에는 가판들이 있었다



이 길의 시작점에는 동상과 같은 재질로 구 시가를 미니어쳐로 만든 조형물이 있었다

그 크기가 제법 큰 편이었는데, 종탑이 우뚝 솟아있어 담았다



저 멀리 보이는 '마르얀(Marjan) 언덕'

저 언덕 위에 전망대 같은 곳이 있다고 호스텔에서 알려주었고

야경이 예쁘다고 해서 느즈막히 올라가기로 했다



바닷가에서 '디오클레티안 궁전(Dioklecijanova Palača)'을 바라봤다

외벽의 높이는 원래 아파트 7층 높이(22M)였다고 전해지는데

세월의 흔적에 많이 파괴되고 훼손되어 이제는 건물보다도 낮구나

 


그리고 금방 스플리트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긴, 터미널이라기보다는 그냥 길가에 버스를 주차하게 만든 곳에 더 가까워보였다

도시의 유명세에 비해 초라했던 버스터미널. 터미널은 자다르가 훨씬 더 괜찮았다



남문을 통해 '디오클레티안 궁전(Dioklecijanova Palača)'으로 들어갔다

옛날에는 여기는 바다를 통해 들어온 물자들이 성 안으로 운반되는 길이었는데

이제는 다양한 상점과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성벽과 천장을 둘러보니, 그제서야 문화재 안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디오클레티안 궁전(Dioklecijanova Palača)은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은퇴 후 약 10년 간 머물며 여생을 누렸던 곳이다. 현재는 궁전이라 불리지만, 그 당시에는 황제의 저택 겸 별장이었으며,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으므로 요새이기도 했다. 모양은 완전하지 않은 정사각형 모양이고, 그 크기는 약 축구장 4개 크기에 달한다. 지금 대리석으로 덮인 해안길(Obala Hrvatskog Narodnog Preporoda) 쪽에 궁전의 외벽이 남아 있는데, 원래 이 벽의 높이는 약 22M(아파트 7층 높이) 가량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 궁전은 네 개의 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당시 귀한 광물의 이름을 따서 북쪽은 '포르타 아우레아(황금의 문 / Porta Aurea)', 동문은 '포르타 아르겐테아(은의 문 / Porta Argentea)', 남문은 포르타 아이네아(청동의 문 / Porta Ainea)' 서문은 포르타 페레아(철의 문 / Porta Ferrea)'이라고 각각 이름지었으며, 이 중에 남문은 바다에 접하고 나머지 세 문은 각각 육지에 접했다. 스플리트 해안길인 'Obala Hrvatskog Narodnog Preporoda'는 원래 바다인 곳을 매립하여 길을 만든 것이며, 이 길에 있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그 당시의 남문인 '포르타 아이네아(청동의 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을 가장 박해한 로마 황제 중 하나였다. 그는 이 궁전에서 약 10년 가량을 살다 죽은 후, 궁전 안에 묻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카톨릭에 대한 박해가 약해지고, 교인들이 힘을 얻게 됨에 따라, 카톨릭 인들은 그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서 묘를 들어내고 성당을 지어버린다. 그 성당이 현재의 '성 도미니우스 성당(Cathedral of Saint Domnius / Katedrala Svetog Duje)'이다. 그리고 그 곳에 있던 황제의 시신은 어디론가 버려져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979년, 궁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기도 하다.



남문으로 들어와 마치 지하 같은 물자 운반로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이렇게 '열주광장(Peristyle)' 이 나타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집무를 보고 실제로 활동했던 중요한 곳



로마시대 건축물 중 기둥으로 둘러싸인 광장을 '페리스타일(Peristyle)'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말로는 '열주광장'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기둥으로 둘러쌓인 광장을 일컫기 때문에,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도 페리스타일(Peristyle/열주광장)'이 있다.



이 곳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한 사람들이 대기했던 곳이라고 한다

돔 형태로 되어 있어서, 소리의 울림이 좋기 때문에

아마추어 아카펠라 그룹이 공연을 하면서 그들의 CD를 팔고 있었다



황제 알현 대기실에서 공연하는 아마추어 아카펠라 그룹

달마치아 지방의 전통음악이라고 하는데,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굉장하게 느껴졌다




해안길에 남아있는 궁전의 외벽을 내부에서 바라보았다

궁전이 건설된 게 대략 4세기 경인데,

1천 7백년이 지난 건축물이 남아 있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전 안에 있었던 뭔가 현대적인 느낌의 조형물

수많은 원을 모아놓은 것 같은데 뭔가 아티스틱 했다



이 곳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오랜 세월 동안 민가와 하나가 되었다

전쟁통에 파괴된 궁전의 돌을 재료 삼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을 지었다

일부는 궁전의 벽에 붙여서 지었는데, 이런 집이 그러한 형태였다



로마인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명으로 서기 4세기 경에 지어진 이 궁전은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러나 같은 로마인들의 정치싸움으로 인해 폐허가 되고, 몇 세기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다. 그러다가 7세기 경에 이민족이 침입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이에 사람들은 궁전의 외벽을 성벽처럼 활용해 이민족을 피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궁전 내부로 이주해오고, 그들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집을 짓고, 장사를 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궁전은 보존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1천 7백년이나 된 건물이라 생각하면 남아있는 것 자체가 용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남아있게 된 데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집을 지어 생활했던 사람들의 공이 크다는 생각이 들더라. 건물이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생활의 일부가 되어 오랜시간 지켜져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런지.


사람들 때문에 보존상태가 안좋다기보다는, 그들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




스플리트 종탑(Bell Tower)에 올라가는 길이다

매우 좁고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아마 1700년대에 만든 종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색도 바래서 오래된 느낌이 났으니



프라하 구시가 광장에 있는 시계탑을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생각을 하며 스플리트 종탑에 룰루랄라 올라갔는데, 달랐다. 조금 많이 무서웠다. 위 쪽에 있는 사진에 있는 것처럼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서는 철 계단이 나왔다. 그런데 그 철 계단이 가관이었다. 아래 쪽에는 그 어떤 지지대도 없이 한 쪽 벽에만 고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밟고 있는 계단의 아래는 그 어떤 기둥도 없이 붕 떠있고, 단지 계단의 오른쪽 끝이 벽에 고정되어 있는 그럼 그림.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포 그 자체였다. 아래를 안보려고 해도 의식적으로 아래를 보게 되고, 그 아찔함에 온 몸에 털이 곤두서는 짜릿한 경험. 정말 진지하게 '아, 그냥 돌아갈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숨이 차올랐지만 빨리 그 계단을 벗어나고 싶어서 광속으로 내달렸더니, 계단이 흔들려서 더 무서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사진이 없는 이유는 공포가 극에 달해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것. 아, 진짜 짧았지만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종탑의 꼭대기에 올라가보니..








종탑은 이렇게나 멋진 풍경을 숨겨두고 있었다

솔직히 올라오는데 진짜 후덜덜하지만, 올라올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종탑, 성당, 지하실, 보물 보관실 등을 묶어서 패키지 입장권을 파는데

다른 건 그저 그럴지라도 종탑은 진짜 강추!



로마시대의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고 있는 카페, 룩소(Lvxor)

스핑크스의 기원인 이집트의 도시 룩소(Luxor)가 모티브라 한다

그래서 이 카페 앞에는 검은색 스핑크스가 있다

그리고 어떤 블로그에는 호텔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잘못된 정보다



아까 올라갔다온 종탑

저 벽의 안쪽에는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고정되어 있다

다시 올라가라고 하면 못올라갈 거 같다



그리고 지하실(Crypt)로 왔는데, 지하실답게 눅눅하고 음산했다

돌 표면도 건물 외벽과는 달리 매우 거칠었고




그런데 조금 특이했던 건 테이블에 성모 마리아로 추정되는 조각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돈을 비롯한 온갖 아이템들이 있었다




지하실 안에는 우물이 있었다

예전에는 컬트 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저금통이 되었다



이곳이야말로 그 옛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이 지하실은 그의 무덤 바로 아래에 지어졌으며, 바로 이 지하실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시신이 담긴 석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석관과 시신은 그가 생전에 그렇게 박해했던 카톨릭 교도들에 의해 어디론가 버려져버렸다. 그리고 그의 무덤은 헤체되었고, 그 자리에는 '성 도미니우스 성당(Cathedral of Saint Domnius / Katedrala Svetog Duje)'이 들어서 현재에 이른다.


초기 로마시대, 그러니까 카톨릭이 국교로 인정받기 전에는 이러한 지하실이 신전(Temple)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석관을 이 지하실에 안치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당연히 이 곳은 매우 신성시되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처음에 성모 마리아로 추정했던 저 조각은 '성 루시(St. Lucy)' 또는 '성 루치아(St. Lucia)'이다. 저 손에 들고 있는 쟁반이 그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크리스마스에 죽음을 맞이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와서 그녀를 기리는 선물을 '눈이 그려진 은쟁반' 위에 두고 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원도 빌기 시작했다고.


쟁반이 그녀의 상징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4세기 경, 이탈리아 옆에 있는 시칠리아 섬에 살던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많은 남자들의 청혼을 받았지만 그녀는 수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러자 그녀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어떤 남자가 총독에게 그녀가 카톨릭을 믿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시기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카톨릭 신자들을 매우 핍박하던 시기였다.


총독은 그녀를 창녀집으로 보냈으나, 그 이후 그 어느 누구도 앉아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고, 심지어 황소가 와서 끌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고 한다. 한편 겁에 질린 그녀는 스스로 두 눈을 뽑아 자기에게 닥칠 치욕(창녀집에서 남자들에게 몸이 더럽혀지는)을 보지 않고자 했고, 저 쟁반 위에 자신의 두 눈을 뽑아서 올려두었다. 그리고 총독에게 자신을 고자질한 남자에게 그 두 눈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총독은 그녀를 불태워 죽이려했으나 실패했고, 결국에는 목을 쳐서 죽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성 루시(St. Lucy)' 또는 '성 루치아(St. Lucia)'는 눈/램프/등잔을 상징하며, 그녀가 자신의 눈을 뽑아서 올려둔 쟁반이 그녀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지하실은 좁아서 금방 둘러보고 나왔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닥치는대로 막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