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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14 포르투갈

포르투갈 여행 - 리스본 : 제로니모 수도원(Jerónimos Monastery) / 201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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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 광장(Praça de Rossio)' 인근과 '바이후 알투(Bairro Alto)' 지역을 대강 돌고 나서 '벨렘(Belem)'으로 가고자 했다. 언젠가 인터넷으로 보고서는 포르투갈을 한 번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했었던 '벨렘탑(Torre de Belém)'이 있는 곳.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말하는 에그타르트가 처음 시작된 곳. 아울러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발견의 탑(Padrão dos Descobrimentos)'이 있는 곳. 나에겐 벨렘은 이런 곳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제로니모 수도원(Jerónimos Monastery)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냥 다른 성당이나 교회들처럼 유적지겠지, 하는 생각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달리, 제로니모스 수도원은 이 모든 것을 압도해 버렸다. 리스본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꼭 가봐야할 곳을 내게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이 곳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곳은 너무나도 굉장했다.



벨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피구에이라 광장(Praça da Figueira)'에서 노란 트램(15E)을 타야 했다

사진은 굉장히 잘 나왔지만, 실제 광장은 약간 B급 영화 느낌

수많은 버스와 트램들이 다니는 이 광장은 교통의 중심지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들어오는 15E 노란색 신형 트램

피구에이라 광장이 종점이라 그런지 몇 분 정차했다가 출발하더라는

트램 타는 곳 : 동 존 1세 동상을 마주보면 오른쪽에 옷가게가 있는데 그 앞



왼쪽 끝에 있는 피구에이라 광장에서 15정거장을 가야 하고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그런데 에그타르트와 벨렘탑, 그리고 제로니모스 수도원을 가기 위해서는 벨렘에서 내리면 안되고

그 다음 정거장인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 내려야 한다



사실, 지도를 대충 보고서는 벨렘까지 걸어갈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못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까짓 것 한 번 걸어가보자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이동해보니 걸었으면 큰일 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거리를 확인해보니 약 7.5Km. 실제로 걸었더라면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되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한참을 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약 20분 정도를 이동한다.


트램 안에는 자꾸 눈이 가는 중국인 모녀가 있었다. 나처럼 멀리서 여행 온 것 같았는데, 엄마와 딸이 함께 여행하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더라. 나는 행여나 그들이 나처럼 제로니모스 수도원에 내릴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들은 벨렘에서 내리더라. 나도 내려야 하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간 것이 아니라서 하마트면 그들을 따라서 내릴 뻔했으나 안내렸다. 행여 다시 만날까 싶었으나 그러지는 못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트램 정거장에 내리자마자 나를 압도했던 풍경

때마침 걷힌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쳤는데, 이게 건물을 희게 만들어서 더 웅장해 보였다

시야 전체가 희고 성스러운 건물로 덮인 느낌



그러나 살짝 출출했던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에그타르트를 사오기로 했다

트램 선로를 따라 약 2분만 뒤로 되돌아가면

에그타르트로 유명한 '파스테이스 데 벨렘(Pastéis de Belém)'이 있어서 먼저 들렸다



에그타르트를 처음 만든 집이니만큼, 가게가 크고 사람도 많았다

산뜻한 파랑색이 눈에 확 들어왔고, 바닥에도 가게 이름을 적어놓았더라

현지어로 '나따'라고 불리는 에그타르트를 3개 사서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에그타르트라고 불리는 이 음식은 '파스테이스 데 벨렘'이 원조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 만들던 일종의 디저트와 같은 음식이었다. 특히, 중세 포르투갈의 수도원과 수녀원에서는 그들이 입는 옷의 주름을 펴는 데 계란 흰자를 사용했고, 남은 노른자를 활용해 달달한 간식거리를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Porto)와 같은 도시에서는 와인을 정제하는데 계란 흰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전역에 그런 노른자를 활용한 달달한 음식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근대 포르투갈은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았고, 나폴레옹이 물러간 후에는 영국의 지배를 잠시 받으나, 1820년에 에스파냐 내란을 이용하여 반영국 세력을 주축으로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을 피해 브라질로 피신해 있던 포르투갈 왕이 복귀하면서 왕정이 복고된다. 그러나 이 이후로 모든 남자수도원은 폐쇄되고, 교회재산은 몰수당하게 된다. 이는 수도원 안에서만 전해지던 에그타르트의 비법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20년 자유혁명의 후유증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한 수도사가 있었다. 그는 수도원의 에그타르트의 비법을 기본으로 하여 이 음식의 조리법을 특허로 등록하고서는, '파스테이스 데 벨렘' 측과 계약을 맺었는데, 이로 인해 수도원 안에서만 전해지던 비밀의 조리법이 세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 그리고 현재는 5명의 마스터 쉐프에게만 그 비법이 전해진다고 한다.



수도원의 정문인 줄 알았던 문, 그러나 교회의 남쪽문이라는 거

가까이 다가가니 여태 봐왔던 그 어떤 문보다도 화려하고 우아했다

솔직히 마누엘 양식이 조금 싱겁다고 생각했는데

이 문 하나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두 개의 문 사이에 있는 조각이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이다)



너무 감동적이라 이 문 앞에서만 15분 정도 서성이며 수십 장의 사진을 담았다

그 옛날 포르투갈 전성기 시절에 만들어진..

그리고 1755년의 리스본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건물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보니

그 옛날의 포르투갈과 리스본은 얼마나 화려했을까 잠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료로 개방되어 있는 '산타마리아 교회(Igreja Santa Maria Belém)'로 들어갔는데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서 움직일 생각을 전혀 못하고 그저 눈만 껌벅였다



여행을 하면서 여러 성당과 건축을 봐왔다

영국의 켄터베리 대성당이나, 프라하의 틴성당 또는 자그레브 대성당 등등

그러나 그 어느 성당도 이 곳에 비할 바가 안됐다



포르투갈의 민족시인 '까몽이스(Luis vaz de Camoes)'의 석관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라는 대서사시가 대표작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에 성취한 업적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로카곶의 비석에는 그의 싯구가 적혀있기도 하다



마치 기둥이 나무줄기 같고, 하늘에서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나가는 느낌이었다

마누엘 양식의 기둥은 엄청 화려했고, 높이는 또 얼마나 높던지



매우 정교한 천장

기하학 무늬가 예술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



성당의 앞쪽에서 뒤를 돌아본 모습

이 때까지만 해도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전면 예배당의 모습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더 운치 있었다

(사진은 밝게 보정을 한 것이고, 실제로는 상당히 어두웠다)



그리고 여행 온 듯한 흑인 커플



포르투갈은 인도항로를 개척하면서 황금기가 시작되는데

그 인도항로를 개척한 사람이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이다

이건 그의 석관인데, 까몽이스 석관의 맞은 편에 있었다

석관의 가운데에는 그가 탔던 배인 듯한 범선이 조각되어 있었다



예배당을 정면으로 보고 왼쪽 뒤편에 있던, 그리고 마치 예술품 같았던 그의 석관

위대한 위인이라 그런지 관이 매우 화려했다

까몽이스 석관은 이 석관의 오른쪽이자 예배당의 오른쪽 뒤편에 위치해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석관 뒤에 있던 성 안토니(St. Anthony)를 기리는 채플인데

내게는 종교적 의미보다는 예술적인 의미로 더 다가왔다

17세기에 만들어졌고, 마누엘 스타일의 정교한 나무 조각에 금을 입혔다



제로니모스 수도원은 수도원과 '산타마리아 교회(Igreja Santa Maria Belém)'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주의할 점은 예배당이 성당이 아니라 교회라는 점. 알파마에 있는 리스본대성당의 이름도 산타마리아이기 때문에 헷갈릴 수가 있다. 여튼, 이 교회는 관광객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건물 자체가 마뉴엘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수도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실제로도 매우 화려하고 웅장하다. 이 건물을 보고 리스본 대성당을 둘러봤는데, 고딕양식의 건물이 얼마나 심심한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755년 리스본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건물이기도 하다.


한편, 수도원은 입장료를 받는다. 만약 벨렘탑을 가는 일정이라면 수도원 입장 시, 벨렘탑 입장이 가능한 콤보 입장권으로 구입하는 게 좋다. 비용은 10유로.



수도원 내부로 들어오자 정사각형인 듯한 2층의 외벽으로 둘러쳐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산타마리아 교회와 같이 마누엘 양식이라 매우 화려했다

옛날에는 이 공간(옆에 고고학박물관으로 쓰이는 건물 포함)에서

국방의 의무를 함께 띈 수도사들이 거주하면서 신과 나라에 대한 의무를 이행했다



수도원의 복도는 걷다보면 한바퀴 돌아 제자리로 올 수 있었다

1, 2층 모두 둘러볼 수 있었는데, 2층은 교회의 성가대석과 연결되어 있었 다

복도마저도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마누엘 양식과 르네상스, 그리고 플래터레스크 스타일의 외관

멀리서 보면 다 똑같아 보이는 조각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조금씩 달랐다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디테일에 깜짝 놀랐다



수도원과 산타마리아 교회를 함께 담았다

그러나 이 때쯤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끄러워지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리지더라는..

그리고 여기서 급했던 화장실을 해결했다



수도원은 교회 2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2층에는 성가대 자리가 있었으나 사진으로 담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한편 2층에서 바라보는 예배당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2층 예배당의 정 가운데에는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조각이 있었다

옛날 작품은 아니고 근대 이후의 작품



수도원을 나와 산타마리아 교회를 다시 담았다

건축물이 너무나도 멋져서 떠나기 싫은 적은 처음이었다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수도원의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냥 그 웅장한 규모를 밖에서 감상하는게 더 좋았다

그리고 박물관 앞에 보이는 밝은 복장의 사람들은 장년의 한국인 같았는데

친구들끼리 온 듯한 모습이 부러웠다

나도 나중에 그리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황제의 정원(Jardim da Praça do Império)'의 중앙에는 큰 분수가 있었는데

그 분수를 살짝 둘러보고는 앞쪽으로 보이는 발견의 탑으로 향했다

걸어서 10분은 가야했고, 지하도를 건너야 했다



옛날부터 이 곳은 리스본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리스본을 드나는 배가 항상 지나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역사에서 이 지역이 가지는 역사적 중요성은 상당히 크다. 그리하여 엔리케 왕자는 이 곳에 '히에로니무스(Hieronymites-라틴어)/제로니모스(Jerónimos-포르투갈어)/제롬(Jerome-영어)'을 섬기는 작은 예배당을 짓고 군종병을 상주시켜 놓았다. 그리고 바스코 다 가마와 그의 선원들도 동양을 향해 출정하기 전 그 작은 예배당에서 철야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게 1497년의 일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사실 동 마누엘 1세가 아비스 왕조의 묘를 생각하고 1501년에 건축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기도를 하고 동방원정을 떠난 바스코 다 가마가 약 3년 후에 어마어마한 황금과 발견물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동 마누엘 1세는 생각이 바뀌어 리스본의 입구인 이 곳에 포르투갈의 위엄을 뽐낼 수 있는 수도원을 짓기로 하고, 교황청의 승인을 얻는다. 그 후 이 곳은 포르투갈의 전성기인 대항해시대를 대표하는 건물이자, 선원과 항해사들에게 반드시 들려 자신들의 안전과 새로운 발견을 기도하는 성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바스코 다 가마의 석관이 이 곳에 안치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이 곳에서 '히에로니무스(Hieronymites-라틴어)/제로니모스(Jerónimos-포르투갈어)/제롬(Jerome-영어)'을 기리는 이유는 그가 왕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고고학자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 엔리케 왕자가 그러하였듯이 동 마누엘 1세도 같은 성인을 이 곳에서 기리기로 결정한다. 한편, 이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입품에 대해 5%의 관세를부과하였는데, 그 상한선이 1년에 황금 70kg 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건축 프로젝트를 지시했던 동 마뉴엘 1세는 1521년에 사망하고, 그 후 80년이 지나서야 완공된다.


이후 포르투갈의 전성기가 끝나고 스페인과 합병된 이후에는 스페인 왕가의 묘소로 잠시 쓰이기도 하는데, 왕족과 수도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접근이 통제된다. 이 곳을 왕가의 묘소로 쓰는 건 포르투갈 독립 이후에도 이어져 포르투갈의 왕과 그 가족들도 일부 이 곳에 안치되어 있다. 건물 자체는 1601년에 완공되었지만, 추가적인 개/보수와 내부 인테리어 공사는 계속되었다. 완공 후에도 약 170년 동안 계속되어 1770년에 계단을 장식하는 프레스코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1755년에 리스본대지진이 일어났지만, 예배당 2층을 제외한 다른 부분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기에 빠르게 복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820년 자유혁명 이후에 수도원이 왕궁으로 변경됨에 따라, 수도원이 폐쇄되게 된다. 약 1400년대 중반, 그 옛날 엔리케 왕자로부터 시작된 '히에로니무스(Hieronymites-라틴어)/제로니모스(Jerónimos-포르투갈어)/제롬(Jerome-영어)'에 대한 경배는 이로 인해 영영 끝나게 된다. 한편 수도원의 재산과 수도원이 보유하고 있던 수많은 문화재급 귀중품들과 예술품들은 이 시기에 도난당하거나 사라지게 되며, 이후 수십년 간 수도원과 교회는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파손되다가 1850년이 되어서야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