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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13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여행 - 모스크바 공항을 경유하여 (18시간 환승 대기) / 2013.0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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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인천(ICN)공항을 출발한 나는 약 9시간의 비행 끝에 모스크바의 셰레메티예보(SVO)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18시간 20분의 엄청난 대기시간이었다. 표를 예매할 때, 꼭 이 항공편을 이용해야 하는지 길고 긴 고민을 했지만, 이스탄불을 거쳐서 가는 것 보다 가격이 50만원 이상 저렴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여튼, 비행기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지루하게 있는 대기시간을 줄여보고자 비행기에서 나갈 때도 일부러 천천히 나갔다. 터벅터벅 내가 걷던 곳은 터미널 D.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탔던 사람들이 내 뒤에서 나타나 종종 걸음으로 저 앞으로 사라져 갔다. 


천천히 걷다보니, 환승 안내 데스크가 보였다. 모든 승객이 그 데스크를 지나갔지만, 나는 직원에게 다가가 "한국에서 자그레브 가는 길인데, 체크인 할 때 직원이 체크인을 한 번 더 하라고 했다" 라고 얘기했더니 알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나도, 러시아 사람들도 영어가 서투른 건 마찬가지였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확인하더니, 내일 가는 게 맞냐고 물길래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는 티켓을 받았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후, 셰레메티예보 공항 터미널 D의 탑승자 대기공간에 들어섰다. 면세점들이 있었고,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이 보였다. T.G.I Friday와 버거킹이 눈에 익었다.



  내가 러시아어는 읽을 줄 모르지만

이 가게가 버거킹이라는 건 안다

사먹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뭘 할까 하다가, 공항 유랑을 하기로 했다. 걸어다니면서 사람 구경도 하고, 터미널이 서로 연결되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그냥 막 한 쪽으로 길을 잡고 걸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터미널 E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날 수 있었다. 


으응? 터미널 D와 E가 연결되어 있었다니.. 혹시나 터미널 F도 갈 수 있을까 싶어 계속 걸었다. 그리고 걷다보니 마침내 터미널 F로 통하는 복도를 찾았다. 그리고 공항 전체의 끝에서 끝까지 몇 번이나 왔다갔다 했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다. 중간중간에 가게에 들어가 구경도 했지만, 뭔가를 사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걷기 운동으로 피곤해진 나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끌어 안고 의자에 앉았다.


결론 : 셰레메티예보 공항의 터미널 D, E, F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 계류장의 모습

저 멀리 보이는 파란 꼬리 날개들이 예뻤고

이 앞의 카고(Cargo)들도 줄줄이 일렬로 늘어선 게 귀여웠다



다행히도 공항 내에서 무료와이 파이가 제공(아마 터미널 D만 무료로 제공되는 듯) 되어서 인터넷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가져간 책도 읽고, 아이패드로 영화도 보고 그랬으나, 시간은 여전히 많이 남았다. 그렇게 별 의미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터미널 내 사람이 매우 줄어들어 있었다. 그 때 시간이 밤 11시 반쯤 되었던 거 같다. 


한 자리에 계속 있기가 답답하기도 하고 따분하기도 해서 일어나서 걸었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공항 내부가 상당히 쌀쌀했다. 게다가 나랑 같은 처지라서 공항에서 밤을 새려는 외국인들은 모두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들 여기가 밤에 춥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싶었다. 기내용 담요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는 침낭을 가져온 이도 있었다.


밤 11시에 이 정도라면, 잠이 든 이후라든지, 새벽에는 추위를 느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보며 기내용 담요를 가지고 나올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살까, 하고 생각도 해봤으나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고, 게다가 명품 브랜드가 많아서 함부로 살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공항 내에서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밤새 있던 곳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면 마트로시카 인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찾은 곳 중 그나마 따뜻했던 곳은 터미널 D의 31번 게이트 인근이었다. 30번과 31번 사이에는 흡연실이 있고, 대각선 건너에 작은 매점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것은 그 매점의 화려한 조명이었다. 매점은 문을 닫았지만 조명은 켜진 상태였고, 나는 그 조명에서 상당한 열이 발산되리라고 생각하여, 윗 사진처럼 마트로시카의 뒷모습이 보이는 한 쪽 벽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2시까지 몸을 이리저리 꼬며 앉아서 졸았다. 의자에 누워 자고 싶었지만 의자와 의자 사이에는 낮게 고정된 팔걸이가 있어서 도저히 누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피로가 극도에 달하니 어떻게든 누우려고 노력하게 되더라.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성공했다. 얼굴을 등받이 쪽으로 두고, 팔걸이의 끝부분과 몸이 접히는 부분을 일치시키면 불편하긴 하지만 새우잠을 자는 것처럼 쪼그려 누울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추위와 싸우며 3시간 정도를 설잠을 잤다.



내가 있던 곳에서 31번 게이트 쪽으로 시선을 두고 사진을 담았다

오른쪽 아래 의자의 앞쪽으로 매점이 있는데

그 매점의 마트로시카가 있는 벽과 가장 가까운 의자가 그나마 제일 따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더 따뜻한 곳을 찾으러 나갔다가 여기가 명당임을 깨닫고 다시 왔으니까

여튼, 이 공항에서 밤을 새려면 두꺼운 긴팔이 꼭 필요하다

얇은 구스다운 점퍼도 괜찮을 듯



문득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뒷등으로 들렸다. 처음에는 비몽사몽 간에 들렸는데, 점점 반복되다보니 정신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반 쯤 되었는데, 잠자리가 이상해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한 게 상태가 말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간 버틸만큼 버텼으니, 이제야 말로 VIP 라운지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PP 카드가 있으면, 공항 내 VIP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셰레메체보 공항에서 PP카드로 이용할 수 있는 VIP 라운지는 터미널 E에 위치한 갤럭시 라운지 하나 뿐이다. 그나마도 출발 3시간 전이 되어야 이용할 수 있다.


원래는 오전 7시경 부터 이용할 수 있지만, 새벽이니까 감시가 무뎌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라운지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있던 공간을 벗어나니 어마어마하게 춥더라. 그리고 라운지로 찾았고, 들어가는데도 성공했다. 처음으로 가본 VIP 라운지였는데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 배가 고파서 커피와 빵을 몇 개 집어와서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빵에서는 아무런 맛이 나질 않았다. 배가 고픈 상태였는데도 아무런 맛이 없었다. 의자는 편안했지만 누울 수는 없없고, 내부는 바깥보다는 조금 따뜻했던 것 같았다.


여기서 샤워를 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샤워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추위에 떨어서 더 추워지고 싶지 않았고, 구석구석 둘러봐도 샤워장으로 보이는 시설이 보이질 않았으며, 그 누구도 샤워를 하지 않아서 나도 그냥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VIP 라운지에서 먹었던 빵과 커피

빵은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아무런 맛이 나질 않았다



9시 반쯤에 라운지가 거의 꽉 찰 정도로 사람이 많아지는 걸 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터미널 유랑을 시작했다. 그리고 공항 내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자그레브로 출발할 비행기가 뜰 시간도 가까워져 왔다. 마치 좀머씨처럼 정신없이 걷고 또 걷던 어느 순간엔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11시를 5분 남겨놓은 시간에 그렇게 힘들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항공기 탑승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