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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여행

시간이 눌러앉아 쉬는 곳 -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 + 그 인근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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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군산은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여행 카페에 작성된 여행기에 묘사된 군산은 지나버린 시간에 향수를 가진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주기에 최적인 곳처럼 보였다. 경암동 철길마을, 이성당, 군산세관, 심지어 일본 느낌이 나는 히로쓰 가옥과 동국사까지, 시간이 지나가버리지 않고 눌러앉아 쉬는 곳 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느낌이 왠지 일본의 오사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가려했지만, 엉덩이가 무거워서 주저않기를 여러 번. 그러는 사이에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려고 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마음을 독하게 먹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나갈 때는 귀찮았지만, 막상 밖에서 따뜻한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을 받으며 걸으니 잘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근에 있는 한적한 곳에 차를 주차해 놓고 경암동 철길마을을 시작으로 하루종일 걸어다녔다. 마치 시간이 멈춘듯한 착각이 들었던 곳.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기차가 저 멀리서 오지 않을까, 하고 상상력이 마구 발산되던 곳. 이 곳은 그런 곳이었다.



누가누가 철길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지 경쟁하듯 낡은 건물들이 서 있었다

만약에 기차가 지나가면 벽에 스칠 것만 같이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는 더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기찻길'에 매혹되어 땅을 보며 걸었던 것 같다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낡은 선로 위에 녹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느 집 벽에 있던 조화 화분 네 개랑 가스통 하나

이 곳의 분위기가 약간 무겁게 다가왔었는데, 덕분에 약간 산뜻해지더라는



베이지색과 파랑색으로 구성된 철길마을의 풍경

철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주민이 널어놓은 빨래



군산에는 '페이퍼코리아'라는 회사가 있다. 지도에서 찾아보면 그 크기가 어마어마 하다. 이 공장은 신문용지를 만드는 공장이고 주인이 몇 번인가 바뀌었는데, 그 때마다 기찻길의 이름도 바뀐 모양이다. 지금의 선로명은 '페이퍼코리아선'이지만, 예전에는' 세풍철도'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고, 50년대 중반까지는 '북선제지 철도'라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 공장과 군산항을 이어주는 선로가 바로 이 기찻길이다. 1944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경암동 일대를 매립해 방직공장을 지으면서 함께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공식이름은 '경암선'이라고 한다. 2008년 6월말까지 화물열차가 다녔지만, 지금은 폐선된 상태.




철길은 어떤 가게가 입주해 있는 건물 뒤로 나 있었다

간판가게이거나 아니면 철골 구조물을 다루는 가게 같았다

이제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 위로 시멘트를 발라서

그 가게가 선로 쪽으로 땅을 넓히고 있었다



걸어다다가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풍경

저 의자와 대문과 우편함과 햇빛이 너무 조화로웠다

이 사진을 담을 때 왠 외국인 커플이 쿨하게 지나가더라는




회색 벽

오래되고 낡았으나 도도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지만)



처음에는 조금 쭈뼛했다. 실제로 주민들이 사는 곳인데 취미로 사진을 찍는답시고 설쳐대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신에게는 삶의 터전인데, 내게는 취미. 고단한 그들의 삶의 무게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만드는 것 같아서 미안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한 무리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내 앞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사실 그 사람들에게 용기를 얻어 철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민을 만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발자국 소리도 죽이면서 걸었다.


중간쯤 갔을까? 결국에는 그도록 바라지 않던 주민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어떤 집 앞에 놓여있는 평상에 앉아 수다를 떨면서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나를 경계하거나 원망/불신의 눈초리를 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척하다가 불편한 마음에 이내 피해버렸고, 조용히 그들 곁을 지나 아무렇지 않을 척하며 선로를 따라 걸었다.


기찻길은 생각보다 짧다. 15분 정도 걸으니 끝이 보였던 것 같다. 걸어왔던 풍경에 비해 그 끝은 초라해서, 철길은 점점 시멘트로 메워지더니 이윽고 동네 주민들의 텃밭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끝나버린다. 그래도 잠시나마 70년대를 여행한 것만 같은 기분, 시간이 멈춰있는 그 순간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부인할 수 없다. 기찻길은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미적거리면서 끝나버렸고, 나는 군산항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기찻길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끝나버리고 계속 걷던 길에

웅크린 고양이처럼 아담한 건물에 자리잡은 미용실

하지만 모양새로 봐서는 더이상 문을 열진 않을 것 같았다



작은 하천이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작은 수문이 있었으나

하천은 그다지 깨끗하지 않아보였다

녹색을 띄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냄새도 좀 났었다




경포천 옆 길을 걸으며 담은 두 장의 사진

붕괴위험이라고 써진 집은 멀리서도 눈에 띄어 낼름 담았고

길 가에 빨래를 널어놓았길래 한 장 담아봤다



현장에서는 무슨 건물인지 몰랐다가

인터넷을 찾아보고서야 화력 발전소라는 걸 알게 된 건물




그리고 그 인근에 있는 낡은 풍경들

마치 시간이 70년에 멈춘듯한 그런 풍경들이었다

심지어 간판도 페인트로 써놓은 곳들도 있더라는

그냥 오랫동안 보전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골목길을 걸으면서 군산항 쪽으로 가는 길, 바닷가와 접한 길을 걸으면서 느긋하게 걸으려는 내 계획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바다와 접한 부분은 공원조성(?)을 위해서 공사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는 영락없는 공사판이고, 일부 도로는 비포장이라서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서 큰 길(해망로)에 합류하게 되었다. 경암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해망로가 왼쪽으로 급하게 꺾이는 곳이 있는데, 이 인근에 큰 공터가 있었다. 철조망이 쳐져 있었지만 , 어르신 두 명이 텃밭을 일구시던 중이었고, 영락없이 개구멍이 있었다. 그리 살짝 들어가서는 텃밭을 지나 아래 세 장의 사진을 담았다.





버려지고 물이 빠진 풍경

한 때는 복작복작했을 것 같은 곳이었는데, 버려지고 잔뜩 녹이 슬어있었다

어쩌면 썰물이라 그런 분위기가 더 났던지도



해망로를 나와 서쪽으로 걸어가는 길
그다지 매력적인 곳도 없고, 걷기에도 좋은 길은 아니라서 조금 아쉬웠었다


경암동 철길마을을 관통하는 페이퍼코리아선은 군산항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기찻길을 따라가지 않고 해변쪽으로 걸어올라가 바닷가를 보며 걸어 군산항까지 가려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바닷가는 항구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었다. 1시간 여를 걸으면서, 관광지가 아닌 군산의 모습을 봐서 좋았으나, 걷기에는 결코 짧은 길이 아니었다는 것도 함정이라면 함정이었다. 끝난 줄 알았던 페이퍼코리아선은 중간중간에 선로를 뜯어내지 않고 있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었는데, 그 기찻길이 되게 반가웠다. 낯선 땅에서 친구를 만나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