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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여행

그게 가능해? 전주 당일치기 여행 1/2 (풍남문, 전동성당, 경기전) - 201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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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드니, 몸이 무거워지는 걸까? '내일 아침에 당장 떠나자!' 라고 생각했다가도 이내 귀찮아져서 여행을 접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가장 빈번했던 변명거리는 'KTX 매진'. 그러나 전주까지 가는 차편은 누리로도 있고 고속버스도 있었다. 가려는 의지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갈 수 있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왠지 떠나는 게 예전 같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여행을 가기로 한 날, 8시가 조금 못된 시간에 일어났다. 전주까지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에는 늦었다는 이야기다. KTX는 이미 몇 주 전부터 매진이라, 일반 기차를 보니, 용산역에서 9시 49분에 출발하는 누리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내적 갈등은. 갈지말지 수없이 생각하고 고민했다. 


번복과 번복을 수없이 하다가, 뭐 어찌됐든 가보기나 하자며 늦었어도 가는 걸로 결정! 그것도 차를 가져가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내 차를 운전하지 않고 가는 여행이 얼마만이던가? 게다가 기차는 진짜 백만년 만에 타는 것 같았다. 적어도 기차를 탄지 7년 이상이 된 건 확실했다. 그래서 기차를 타는 게 비행기 타는 것보다 더 설레였으니.



비록 늦은 시간이었지만, 안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끊은 기차표

너무나도 오랜만에 타는 기차라서 진심으로 너무나 설레였다



그런데 내가 탈 기차가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원래는 한 번도 안 타 본 KTX를 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보니까 기차보다는 전철에 더 가까운 모습인 것 같다



돌아오는 차편은 기차 안에서 휴대폰으로 예약했다

내려갈 때는 기차, 올라올 때는 고속버스를 이용(m.kobus.co.kr)했다

내일 출근을 감안해서, 아쉽지만 조금 이른 시간에 올라오기로 했다



그렇게 3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전주역

한옥마을의 고장답게 기차역도 한옥이었고, 너무 멋졌다

몇 십년이 지나도 헐어버리지 말고, 그대로 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주역을 나오면 광장이 있는데, 1시 방향에 관광 안내소가 있었다

우선 관광 안내소로 가서 지도를 하나 얻고, 79번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배차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역 바깥으로 나가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이 때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민소매 차림의 여자들이었는데, 크기가 제법 큰 백팩을 짊어진 게 배낭여행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뭐랄까? 처음에는 역 앞 광장에서 마주쳤다가 내가 관광안내소를 다녀온 사이 79번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눈이 그녀들을 따라갔다. 그녀들의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바라보며, 왜 나는 저런 여행을 해보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내가 역 바깥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게 된 것도 그녀들이 먼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뭔가있다!' 라는 생각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비록 그 버스정류장에서 나와는 다른 버스를 타면서 헤어졌고, 사진도 찍어놓지 않았지만, 대단한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도 큰 배낭을 메고 전국일주 같은 것을 언젠가는 하리라.


나는 543번 버스를 탔다. 그런데 내 앞 자리에 DSLR 카메라를 어깨에 맨, 그냥 봐도 여행객으로 보이는 샤랄라한 여자가 한 명 있었다. 나는 어디서 내려야 할 줄 몰라서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켜서 현재위치를 가늠하다가 그 여자를 보고서는, 그녀가 내리는 곳에서 같이 내리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는 잠시 넋을 놓았다. 


문득,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골목 사이로 풍남문을 본 것 같아 정신을 차렸다. 뭔가 거대한 한옥이 지나갔는데, 그게 풍남문인지 아닌지 헷갈려하는 동안, 그 여자가 내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관광지는 아니었고, 분위기가 이상했는데, 일단은 그 여자를 따라 허겁지겁 내렸다. 그리고는 혼자 머쓱해서 길 가에서 가방 정리를 하면서 카메라를 꺼냈다. 스마트폰으로 현위치를 찍어보니, 풍남문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그 사이에 그 여자는 어디로가 사라져버렸다.





시장을 10여 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풍남문

안쪽의 현판에는 '호남제일문'이라 쓰여있고, 바깥쪽에는 '풍남문'이라 쓰여 있었다

실제로 보니, 성문의 바깥 쪽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무척 아름다웠다



풍남문은 전주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성문이라고 한다. 1900년대 초에 도시화의 일환으로 풍남문을 제외한 성문과 성벽이 모두 헐렸다고 전해진다. 모두 다 남아있었다면 더 좋았을테지만, 하나라도 남은 게 어디냐며 위로했다. 모습도 보아하니, 관리도 잘 되고 있는 것 같고.


이 문 자체는 되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짠해졌다. 왜냐하면, 성은 방어를 위해 구축하는 것인데, 성벽의 높이나, 성문의 크기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너무나도 작고 아담해 보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게 쉽게 점령당했던 역사가 쉽게 이해가 갔다.


우리 선조들은 평화로운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성벽을 높이 쌓을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전주한옥마을에 도착하니, 판소리(?)가 한 판 벌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가니까 다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하길래, 발걸음을 돌려 전동선당으로 향했다

팀 이름을 언급하셨는데, 죄송하게도 기억을 못한다



카메라 무게가 부담스러워서 50.4 하나만 물려서 가져갔는데, 전동성당 건물을 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왼편 주차장 끝에서 기를 쓰고 담아봤지만, 화각이 제한되어 있어 마음에 들게 담긴 사진이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성당 외부를 걷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어린 양의 모습이 되리라 생각하고 담았는데

그 의도가 어느 정도는 결과물에 묻어 나온 것 같다



전동성당의 실내

바깥은 엄청 더웠는데, 안은 정말 시원했다

그리고 첫 인상은, '어라? 생각보다 작네?' 였다



유럽에 있는 대성당을 보고 와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경이롭다던가 굉장하다는 느낌 대신에, 소박하고 아담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리고 내부에 쓰인 벽돌들은 왠지 모르게 귀여웠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나무의자를 비추고 있었다

비록 유럽에 있는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만큼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머나먼 동쪽의 끝, 대한민국에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전동성당 입구의 관광객들



그리고 사진 6장을 이어 붙인 전동성당의 모습

진작에 이렇게 할 껄, 괜히 주차장에서 끙끙댔네

실제로 보니, 예쁘더라, 성당이



그리고는 성당을 한 바퀴 돌았다

첨탑을 올려다 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패턴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담았는데, 아냐아냐.. ㅠ_ㅜ

그리고 날도 무지막지하게 더웠다.

습도는 높지 않았는데, 햇볕이 따가웠다



뒤편에서 바라본 성당

사진으로 봤을 때도, 이 모습은 자주 본 적이 없다

이 사진을 담고서는 왠지 새로워했다는



성당을 나와 경기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가가 2층짜리 한옥으로 되어 있었다

컨셉에 맞춰 잘 해놨다는 생각이 들었고, 건물 자체도 매우 예뻤다



오늘은 마침, 전주대사습놀이 본선 생방송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입장료가 무료! 이런 소소한 기쁨이! 하하!



경기전 내부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엄청 많았다

판소리 공연을 볼 수 있겠구나, 싶어 무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아직 방송 전이었다.

조금 기다려보니, 배추머리 김병조씨와 여자 아나운서 한 분이 나오셨다

공연을 시작하나 싶었는데, 진행 리허설을 하더라는

그래서 그냥 경기전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어 있던 전주서고

여기를 둘러본 후, 조선왕조실록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안에서, 세계 어느나라에도 이런 기록문화유산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건물은 복원된 것이며, 땡볕의 바깥과는 달리 실내는 매우 시원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태조(이성계)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의 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이다. 대단한 것은 이게 어느 한 시기에 어떤 한 두 사람이 뚝딱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이 존재하였던 518년 동안 매일매일 만들어졌는데, 그렇기에 이 기록이 굉장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세계 어느나라에도 없는 정교하고 객관적이며, 오랜 전통을 가진 기록 체계로 작성된 기록이다.


조선시대에는 '사관'이라고 불리는 관리가 왕을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여 문서화하였는데, 이를 '사초'라고 한다. 이 사초는 사관이 퇴근할 때 본인의 집으로 가져가 왕의 열람이나 조작을 방지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초는 매일 작성되었고, 임금이 승하하면 사관들은 사초를 모아 실록을 작성하였는데, 사초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왕들은 실록을 볼 수 없었다. 한 번은 세종대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의 실록을 보고자 신하들에게 물었다가 맹사성 등의 반대로 보지 못했고, 그 이후로 왕이 실록을 보지 않는 전통이 만들어져게 되었다.


실록이 완성되고 나면, 사초는 물에 깨끗이 씻었다. 먹물을 빼내 기록이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실록은 유실 방지를 위하여 여러 부를 인쇄하여 전국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실록을 보관하는 곳을 '서고'라고 불렀으며,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 / 충주 / 전주 / 성주의 4 사고에 각 1부 씩을 뒀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만이 남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실록을 보전하기 위해 실록이 든 나무궤짝 수십 개를 짊어지고 지리산을 올라갔다고 한다. 이후, 전주 사고에 있던 실록을 바탕으로 실록을 다시 인쇄하여, 춘추관 / 마니산 / 태백산 / 묘향산 /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였으며, 일부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가기록원 및 김일성종합대학 등등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경기전 안에 모셔져 있던 조선 태조(이성계)의 어진

근데 조금 삐딱하게 달려 있던데, 일부러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 어진이 역대 조선의 임금의 어진 중 완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인데

진본은 근처의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왕이 행차를 나서면, 뒤를 따라다녔을 것 같은 소품들

잘 모르겠지만, 부채랑 햇볕 가리개 같다



경기전 건물은 그 구조가 익숙했다

예전에 단종의 묘인 '장릉'에서 봤던 건물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가운데에는 신로(혼백이 다니는 길)도 있었다

이 건물 안에 태조의 어진이 있었다



경기전 곳곳에는 옛날 복장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입어보고 사진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새 경기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전주대사습놀이 무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많은 장원들이 안내되어 있었지만

오래 전 CF에 나왔던 '제비 몰러 나간다~'의 조상현 명창과

가주 조관우의 아버지인 조통달 명창 외에는 모두가 낯설었다



전주대사습놀이 본선이 시작된 것은 저 이미 멀리서부터 알고 있었다

소리가 제법 커서 멀리까지 들렸기 때문에

축하공연을 시작으로 세 개의 무대를 재미있게 보다가

정신 차리고 경기전 밖으로 나왔다



판소리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가사가 잘 전달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했다. 원래는 하나의 무대만 보고 가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괜찮아서 세 개의 무대를 봐버렸다. 그리고나서 축하공연이 있던 때가 되어야 정신을 차리고 경기전 밖으로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잘하면 판소리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이 곳은 정말 여행지로 매력적인 곳이었다. 어쩌면 서울보다도 더 매력있을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한옥이 있어서 좋았고, 가게가 가득한 타일로 외관을 마감한 2~3층짜리 상가 건물이 없어서 좋았다. 인사동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인데, 이 곳이 훨등히 우월하다. 인사동도 상가를 다 헐어버리고, 이 곳처럼 1층짜리 한옥으로 다시 만들면 좋을 것 같다.


여행 코스는 대강 이렇다. 풍남문을 보고 전동성당을 보고, 그리고 나서 경기전을 둘러봤는데, 이 모든 게 도보로 가능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한옥마을을 그냥 걷기만 해도 여행 온 느낌이었다. 외국의 유명한 관광지를 걷는 듯 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경기전을 나선 나는, 걸었다. 한옥마을 쪽으로.